트로이가 함락된 날, 트로이 왕 프리아모스의 사위인 아이네아스는 일족을 이끌고 탈출에 성공한다. 아이네아스는 아프로디테와 인간 남자사이에 태어난 아들. 아프로디테는 자기 아들이 그리스 병사의 손에 죽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아이네아스 일행은 로마 근처의 해안에서 상륙하게 된다. 그 지역의 왕이 아이네아스에게 반하여 딸을 아내로 주었기 때문에 정착할 땅을 가지게 되었다. 트로이에서 함께 탈출한 아들 아스카니오스가 왕위를 물려 받았다. 30년간 그 땅을 다스리다가 떠나, 로마의 모체가 된 도시 알바롱가라는 새 도시를 건설한다.




Palatinus (팔라티누스) : 로물루스가 건국 당시 자리 잡는다.

Aventinus (아벤티누스) : 로물루스의 동생 로무스가 자리 잡았었으며, 이후에는 이주민들이 자리 잡았다.

Quirinalis (퀴리날리스) : 사비니족이 합병되면서 차지하게 된다.

Caelius (카일리우스) : 알바롱가가 정복당한 후 이주하게 된다.

Capitolnus (카피톨리누스) : 신전 등의 건물들이 자리잡음

Esquilinus (에스퀄리누스)

Viminalis (비미날리스)


이후 기원전 8세기 경, 알바롱가의 왕이 죽자, 동생은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조카인 왕녀를 무녀로 만들어버렸다. 하지만, 전쟁의 신 마르스가 이 왕녀에게 반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쌍둥이 아들이 태어났는데, 왕녀는 그 쌍둥이에게 로물루스와 레무스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숙부는 격분하여 왕녀는 감옥에 갇히고, 쌍둥이는 바구니에 담긴 채 테베레 강에 띄워졌다. 어미 늑대가 그것을 발견하여 쌍둥이에게 젖을 물렸다. 다시 양치기가 발견하여 쌍둥이를 집으로 데려가서 기르게 된다. 쌍둥이 형제는 성장하여 그 일대 양치기들의 우두머리가 되었고, 그와 함께 출생의 비밀도 알게 되었다. 알바롱가로 쳐들어가 무너뜨린 뒤, 형제 사이가 나빠졌다. 형제는 분할 통치를 하기로 하고 로물루스는 팔라티누스 언덕에, 레무스는 아벤티누스 언덕에 각각 세력 기반을 두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두 지역의 경계를 레무스가 넘자 로물루스는 그를 죽인다. 이렇게 로물루스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는 로마가 기원전 753년 4월 건설된다. (로마는 7개의 언덕 위에 세워진다)



그 당시, 로마의 북쪽에는 에트루리아인이, 남쪽에는 그리스인이 자리잡고 있었다. 로마는 국정을 3개 기관에 나누었다. 왕과 원로원, 그리고 민회이다. 로물루스는 100명의 장로들을 모아서 원로원을 창설했다. 로마가 건국된 당시에는 대부분 남자들로 구성된 집단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건국 후, 로물루스는 인근에 사는 사비니족을 축제에 초대했다. 축제일에는 전투가 금지되지만, 축제를 틈타 로마인들은 사비니족 아가씨들을 강탈한다. 이에 따라, 사비니족은 로마에 대해 선전포고를 한다. 로마인들의 아내가 된 여인들이 중지하여, 두 부족은 합쳐지게 된다. 결국, 두 명의 왕이 로마를 지배하게 된다.


기원전 715년, 로물루스는 세상을 떠나고 사비니족 출신의 누마가 제 2대 왕에 오르게 된다. 누마는 43년 동안 로마를 다스린 뒤 저세상으로 떠났다. 제 3대 왕은 툴루스 호스틸리우스가 되었다. 호스틸리우스는 로마 부근의 알바롱가를 무찌르고 합병시켰다. 제 4대 왕은 안쿠스 마르티우스이다. 그는 누마의 외손자로 로마에서 태어나 자랐다. 안쿠스는 테베레 강에 처음으로 다리를 놓았고, 테베레 강 어귀에 있는 오스티아를 정복했다. 제 5대왕은 에트루리아와 코린트인의 혼혈인 타르퀴니우스가 되었다. 그는 투표 전에 선거운동을 하여 왕이 되었다. 그는 팔라티누스 언덕 북쪽의 습지대의 물을 빼기 위해 테베레 강으로 지하수로를 건설했다. 이 간척사업으로 평지가 된 일대는 처음에는 시장으로 쓰이다가 공공 건축물이 건설되기 시작했다. 이후, 로마의 심장부라고 불리게 된 '포룸 로마눔', 즉 '포로로마노'가 탄생되었다. 간척 사업으로 왕래가 편해진 7개의 언덕 가운데 가장 높은 카피톨리누스 언덕 위에는 로마의 최고신 유피테르의 신전이 건설되기 시작했다.

제 6대왕은 타르퀴니우스가 양자로 삼았던 세르비우스 툴리우스가 차지하게 된다. 그는 로마 전체를 지키는 성벽을 완성하는 일을 맡게 된다. 현재도 군데군데 남아있는 이 성벽은 '세르비우스 성벽' 이라고도 불린다. 제 7대왕은 5대왕 타르퀴니우스의 아들이 되었다. 같은 말을 쓰고, 같은 신을 섬기는 라틴 부족들과의 '라틴 동맹'이 시작되었다. 타르퀴니우스와 그의 아들은 잘못된 행동들로 인해, 로마에서 추방당하게 된다.

기원전 509년, 이렇게 로마의 왕정은 끝이 난다. 그리고 임기가 1년인 2명의 집정관이 나라를 다스리는 공화정 시대에 돌입하게 된다.

이후, 귀족과 시민간의 갈등이 계속되다가 기원전 494년, 평민계급의 이익과 권리 수호를 목적으로 하는 '호민관'이라는 전임 관직이 창설된다. 기원전 445년에는 귀족과 평민간의 혼인이 가능해졌다. 이후에도 기원전 410년, 6명의 군사담당관이 집정관 대신 로마를 이끄는 등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법과 제도를 정비해 나가고 있었다.


기원전 6세기 무렵, 북유럽의 켈트족의 이동이 시작되었다. 남쪽으로 밀려난 켈트족은 알프스 산맥을 넘어 밀라노에서 포 강 유역에 자리를 잡았다. 에트루리아는 강성해진 로마에게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고, 기원전 396년 로마는 에트루리아의 유력한 도시인 베이 공략에 성공한다.

기원전 390년, 켈트족은 아펜니노 산맥을 넘어 에트루리아 도시들을 공략하면서 남하한다. 로마는 켈트족에게 짓밟히게 되고, 카피톨리누스 언덕에서 농성을 시작한다. 7개월 간 지속되다가 켈트족과 협상하여, 켈트족은 로마를 떠나게 된다. 로마는 10년간 베이 공략전을 이끈 후, 정치 싸움에서 추방되었던 독재관 카밀루스를 다시 독재관으로 임명한다. 이후, 다시 한번 강력한 방벽을 건설하게 된다.

기원전 367년, '리키니우스 법'을 채택한다. 귀족들로만 이루어졌던 기존의 집정관 체제와 달리, 귀족과 평민 상관없이 집정관이 될 수 있었다. 이후에도 평민의 권리가 확대되어 기원전 300년에는 신에 대한 제사를 맡는 직책도 평민이 오를 수 있었다.


기원전 4세기 경, '로마 연합' 에서는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를 로마를 통해서만 해결하도록 결정하였다. 기존, 라틴 동맹에서는 가맹국의 나라들로 구성되었지만, 로마연합 에서는 재건된 로마에 패배한 국가들로 구성되었다. 로마는 산악지방의 삼니움 족과 북쪽의 켈트족, 에트루리아인을 제압하면서 세력을 확장했다. 기원전 270년, 로마는 북부의 루비콘 강에서 남쪽으로는 메시나 해협에 이르는 이탈리아 반도의 통일을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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