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나와 시라쿠사는 그리스의 식민 활동으로 건설된 도시)


시칠리아의 메시나는 시칠리아 내의 가장 강한 나라였던 시라쿠사의 공격으로, 로마연합에 지원을 요청했다. 카르타고보다는 로마가 지리상으로 가까웠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로마는 메시나와 동맹을 맺음과 동시에 시라쿠사를 공격했다. 시라쿠사의 참주 히에론은 현실적으로 판단하여, 시칠리아 서쪽을 점령하고 있는 카르타고가 아닌 로마와 동맹을 맺는다.


이에 위기감이 높아진 카르타고는 오늘날의 Agrigento를 기점으로 하여, 로마와 맞붙을 것을 결심한다.


B.C.264 1차 포에니 전쟁 (페니키아인과의 전쟁이라는 뜻)


로마는 Agrigento를 점령하고 지속적으로 카르타고 수하의 도시를 공격했지만, 본국으로부터 계속 되는 지원을 막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카르타고는 5단층 갤리선 120척 가량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로마는 남부의 항구 도시에도 3단층 갤리선 밖에 없었다. 따라서, 메시나 해협 (메시나와 레조디 칼라브리아 사이의 해협)을 처음 건널 때, 포획한 카르타고의 5단층 갤리선을 모방하여 배를 건조. 5단층 갤리선 100척과 3단층 갤리선 200척으로 최초의 로마 해군이 탄생했다.

해전 경험이 부족한 로마군은 '까마귀'를 만들어, 적배의 갑판을 뚫어 강하게 고정시킬 수 있도록 하여 백병전을 준비한다.



밀라초와 팔레르모 해전에서 승리한 로마는 군선을 더 건조하여, 카르타고 본국으로 공격하기로 결정. 로마는 5단층 갤리선을 230척, 카르타고는 이에 맞서 250척을 건조했다. 메시나에서 출발하여 리카타에서 정비 후, 카르타고를 향해 남서쪽으로 진격하는 로마군과 이를 막기 위한 카르타고 군은 리카타 앞 바다에서 3차 해전을 벌였다. 원뿔 모양의 진을 펼쳐 카르타고로 부터 승리한 로마군은 적 함대가 배치되어 있는 카르타고 만을 피해 동쪽의 클리페아 해변에 상륙했다. 육지에서도 연승을 해나가며 카르타고 수도 근처에 주둔을 하게 된다. 이듬해 봄, 기원전 255년, 로마군은 전쟁 10여년만에 카르타고에 패해 클리페아로 후퇴한다. 이후, 헤르마이움 곶에서 4번째 해전에서 또 로마가 이기게 된다.

해전에서 승리한 로마군은 클리페아 항구에서 남은 병사들을 시칠리아로 철수 시킨다. 돌아오는 길에 태풍을 만난 로마군은 6만명을 잃게 된다.

카르타고는 강화 사절을 보냈는데, 로마 원로원에서 이를 거부한다. 이에 따라, 팔레르모를 거점으로 삼아 전투를 진행한다. 하지만, 로마군에 패하여 마르살라로 퇴각한다. 이때 다시, 로마군이 이탈리아 서해안에서 폭풍우를 만나게 된다. 카르타고는 마르살라에 상륙시킨 코끼리 부대를 앞세워 팔레르모로 진격한다. 팔레르모까지 밀리던 로마군은 팔레르모 공방전에서 결국 승리한다.

카르타고 수하의 남은 2 도시, 트라파니와 마르살라를 두고 트라파니 앞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로마군은 크게 패한다. 이후, 마레티모 섬 앞에서 다시 한번 해전이 일어나고 이번엔 로마군이 승리하게 된다. 이로 인해, 카르타고는 로마에 강화를 제의한다.  강화를 수락하며, 카르타고는 시칠리아에서 철수하게 된다. 이로써 ,기원전 241년 23년간의 1차 포에니 전쟁이 막을 내린다.




기원전 240년, 카르타고의 용병들은 임금 지불 문제로 반란을 일으키지만, 238년 정부군에 의해 완전히 무력진압되었다.

이 틈을 타 로마는 사르데냐 섬과 그 북쪽의 코르시카 섬을 로마의 세력 안에 두게 된다.








이후, 카르타고는 에스파냐를 본격적인 식민지로 개발하기로 계획한다. 마지막에 로마와의 1차 포에리 전쟁을 지휘하고, 반란군을 진압했던 하밀카르는 그의 아홉살 난 맏아들 한니발과 에스파냐로 떠난다. 에스파냐의 원주민들을 상대로 연승을 거두며, 농장 경영과 은광 개발에 힘쓴다. 그리고 이주한 지 10년째가 되는 기원전 228년에 '신 카르타고'라고 이름지은 도시 (現 카르타헤나)가 건설된다. 에스파냐를 지배하는 바르카스 가문의 거점이자 상징이 되었다. 하밀카르의 사위인 하스드루발이 그 뒤를 이어받았고 로마와 에브로 강 이북으로는 카르타고의 세력을 넓히지 않기로 협정을 맺는다. 이는 로마의 동맹국인 마르세유의 세력권을 지켜주기 위해서다.




1차 포에리 전쟁 이후, 로마에는 시칠리아의 문화에서 비롯한 '그리스 열풍'이 불었다. 그리고 시칠리아의 시라쿠사, 메시나, 팔레르모 등의 절반의 자치권을 허용하는 도시들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프로빈키아 (속주)가 되었고, 마르살라를 중심으로 하여 통치하게 되었다. 사르데냐와 코르시카 섬도 마찬가지로 프로빈키아가 되었다.




이후, 기원전 229년 아드리아 해의 해적을 소탕하기 위해 브린디시를 출발하여 일리리아 왕국의 아폴로니아 (現 알바니아의 피에르 지역)를 함락시킨다. 일리리아 강화를 통해 아폴로니아와 그 주변 지역의 영유권을 얻었다. 이를 통해, 북쪽을 제외한 동, 서, 남의 방어선을 확고히 했다. 북쪽은 여전히 켈트족(= 갈리아인 '그리스식 호칭')이 지배하고 있었다.




기원전 225년, 갈리아 군은 식량문제로 북부의 포 강을 넘어 남하한다. 로마와 격전을 펼쳤지만, 결국 로마가 승리하게 된다. 이후로도 몇차례 전투는 계속 되었고, 기원전 220년 알프스 이남 지역의 갈리아 인은 대부분 로마와 강화를 맺게 되었다. 이에 따라, 로마는 피아젠차와 크레모나에 식민 도시를 건설하고, 북쪽 국경을 루비콘 강에서 포 강으로 옮기게 된다. 


※ 로마의 현역 (17~45세)을 유니오레스 (Junior의 어원), 예비역 (46~60세)을 세니오레스 (Senior의 어원) 라고 불렀다.



기원전 221년, 카르타고의 에스파냐 총독 하스드루발이 하인에 의해 살해되었고, 그 뒤는 26세 한니발이 이어갔다. 한니발은 사군토 (現 발렌시아 북쪽에 위치한 도시)를 공격했다. 사군토는 동맹인 로마에 도움을 요청했고, 로마는 카르타고에 사절단을 보냈으나 회군 요청을 거절당하고 결국 사군토는 함락된다. 이 소식을 들은 로마의회는 카르타고에 선전포고를 한다. 이렇게 제 2차 포에니 전쟁의 막이 올랐다.





BC.218년 2차 포에니 전쟁 (한니발 전쟁)


한니발은 에브로 강을 넘었고, 이 소식은 로마에 전해졌다. 로마의 2명의 집정관 중 셈프로니우스는 시칠리아로, 코르넬리우스는 피사로 가서 갤리선을 타고 에스파냐로 향했다. 코르넬리우스는 에프파냐로 가기 전에 마르세유에 들렀다. 이때, 한니발이 피레네 산맥을 넘었고 모습을 감추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한니발이 남프랑스 일대를 지나지 않고, 내륙지방으로 크게 우회하는 길을 택했기 때문이다. 론 강 상류(現 발랑스 부근)를 지났고, 순찰하던 로마 기병대와 카르타고 기병대간 전투가 벌어져 코르넬리우스가 한니발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실제로 한니발은 그르노블로 향하고 있었다. 코르넬리우스는 동생에게 남은 병력 전부를 주어 에스파냐로 보냈고, 자신과 직속 장교는 이탈리아로 돌아갔다. 로마 원로원은 예비로 편성해둔 2개의 군단을 피사로 보내는 한편, 시칠리아로 간 셈프로니우스에게 북상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한편, 한니발은 알프스 산맥을 넘어 갈리아 인들을 회유하기 시작했다. 회유에 실패한 경우는 무력을 통해 제압했는데, 토리노는 하루만에 함락되었다. 그 후, 다시 동쪽을 향해 진격했다. 마르세유에서 돌아온 코르넬리우스는 피사의 병력을 이끌고 피아젠차로 향했다. 그리고 정찰을 위해 소수의 병력과 함께 티치노(現 파비아)로 향했다. 거기서 맞닥뜨린 한니발의 기병대에 패해 겨우 도망쳤다. 한니발의 거듭된 진격으로 갈리아 인의 반은 카르타고의 편에 서게 되었다. 이후, 셈프로니우스와 합친 로마군은 트레비아에서 펼쳐진 전투에서 한니발에게 크게 패한다. 후퇴 후, 피아첸차에서 만난 두 집정관은 리미니로 후퇴하고, 어느 쪽에 붙어야 할지 망설이던 부족들은 한니발 편에 서게 된다.


한니발은 볼로냐 근처에서 겨울을 나고 있었고, 새로 선출된 집정관 세르빌리우스는 리미니로, 플라미니우스는 아레초로 가서 전쟁을 대비했다. 한니발은 아펜니노 산맥을 넘어 피렌체를 지났고, 아레초를 동쪽에 둔 채 계속 남하했다. 이탈리아 중부의 트라시메노 호수에 매복하였다. 플라미니우스는 세르빌리우스에게 남하를 요청하고, 트라시메노 호수 북쪽 쯤에서 합류하기로 하고 남하했다. 이미, 한니발이 페루자로 갔을것이라고 예상한 로마군은 한번 더 한니발의 매복에 당해 패하고 만다.




트라시메노에서 대승을 한 한니발은 로마로 곧장 가지 않고, 동쪽 아드리아 해를 끼고 남쪽으로 향했다. 풀리아 지방 (이탈리아의 남동쪽 위치) 에서 분탕질을 한 후, 캄파냐 지방 (이탈리아의 남서쪽 or 남쪽에 위치) 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이 때, 로마는 독재관 파비우스 막시무스를 옹립한다. 파비우스는 한니발과 전투를 벌이지 않고 쫓아만 다니는 전략을 쓴다. 한니발은 매복한 로마군을 피해 아펜니노 산맥을 다시 넘어 풀리아 지방으로 무사히 이동한다. 이로 인해, 파비우스는 파면되고 다시 2명의 집정관이 선출된다.


로마는 한니발을 완전히 몰아내기 위해, 가능한 모든 방법과 병력을 동원하여 베네벤토를 지나 남하하는 한니발을 쫓아갔다. 한니발을 기병전력을 유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칸나에 에서 로마군을 기다렸다. 하지만, 다시 한니발의 포위 전술에 당해 로마군은 패배하게 된다. 이로 인해, 레조 지역을 제외한 남부 지역이 한니발의 손에 들어가고, 카푸아 (現 나폴리 북쪽에 위치) 도 한니발과 동맹을 맺게 된다.


카푸아에서 머물던 한니발은 로마 포로의 몸 값과 함께 강화를 요구하지만, 로마 원로원을 이를 거절한다. 이에 따라, 포로들은 그리스에 노예로 팔려가게 된다. 한편, 마케도니아의 왕 필리포스 5세는 일리리아와 아드리아 해를 평정하기 위해 한니발에게 동맹을 제의하고, 한니발은 이를 수락하게 된다. 로마는 이를 알자마자, 이집트에 특사를 보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동맹을 맺었으며, 그리스 중부의 아이톨리아 인에게 마케도니아 침공을 부추긴다.


카푸아에 머물던 한니발은 로마에 포위당해 전투를 하려고 했지만, 로마는 한니발이 지휘하지 않는 부대만 상대로 전투를 벌이는 방식으로 대응한다. 한니발은 한 번의 겨울을 보내고 이탈리아 남부로 회군한다. 로마는 동쪽의 마케도니아, 서쪽의 에스파냐, 북쪽의 갈리아 인, 남쪽의 한니발과 시라쿠사와 힘겨운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한니발은 캄파냐의 항구도시를 공략하기 위해 북상하지만, 기다리고 있던 병력을 로마에 의해 상당수 잃게 된다. 이에 따라, 타란토로 남하한다. 타란토 공략도 로마군에 의해 실패하게 된다.


기원전 213년, 한니발은 다시 한번 책략을 짜서 타란토 공략에 성공한다. 한편, 시라쿠사를 공략하던 로마군은 아르키메데스가 고안한 병기들로 인해 고전하여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다음 해에, 아르테미스 여신의 축제 일을 이용해 한밤중 성문을 열어 시라쿠사를 함락시킨다. 수학 문제를 풀고 있던 아르키메데스는 그를 알아보진 로마 병사에 의해 살해되었다.


카푸아가 로마군에 포위당한 후, 한니발은 여러 차례에 걸쳐 카푸아 지원에 실패하자 소수 병력을 이끌고 로마의 성문 근처까지 갔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고 다시 남부로 회군한다. 이에 따라, 로마는 카푸아를 함락시키게 된다. 한편, 에스파냐의 1/3을 차지했던 로마군은 카르타고 본국의 지원과 원주민들의 배반 및 공격으로 인해 에브로 강 남쪽의 영향력을 모두 잃게 된다. 이후, 에스파냐에서 전사한 코르넬리우스의 아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가 에스파냐의 사령관으로 파견된다.


기원전 209년, 스키피오는 에스파냐의 수도격인 카르타헤나를 기습 공격하여 단 하루만에 함락시킨다. 그 무렵, 한니발은 이탈리아 남부의 병력을 조금씩 잃어가고 있었다.



기원전 208년, 스키피오는 한니발의 동생 카르타고 제 1군 하스드루발과의 바이쿨라 (現 바일렌) 전투에서 승리한다. 이로 인해, 카디스에 있던 한니발의 막내 동생 마고네가 이끄는 2군과 타구스 강 근처(現 포르투갈 영토) 에 있던 시스코네의 3군은 에스파냐에서 스키피오를 상대하기로 하고, 하스드루발은 피레네 산맥을 넘어 한니발의 경로를 따라 이탈리아로 들어가기로 한다. 기원전 207년, 로마의 메타우로 강 근처에서 펼쳐진 전투에서 하스드루발은 전사한다.


기원전 206년, 일리파 (現 세비아 부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카르타고는 다시 한번 스키피오에게 패하게 된다. 마고네와 시스코네는 겨우 대서양 연안으로 도망치고, 누미디아 기병대장 마시니사는 카디스로 도망친다. 이후, 스키피오는 마시니사를 통해 누미디아 (現 알제리) 까지 외교를 통해 기병을 요청하게 된다. 그해 겨울, 로마군은 2개 군단을 남겨두고 이탈리아로 귀국한다.


기원전 205년, 집정관이 된 스키피오는 시칠리아로 파견된다. 북아프리카를 원했던 스키피오와 그를 반대하는 세력의 절충지였다. 여기서, 정규군이 아닌 병력을 모은 스키피오는 기원전 204년, 마르살라를 떠나 튀니스로 향한다. 하지만, 도착해서 누미디아가 카르타고 편에 서기로 했다는 정보를 듣는다. 마시니사의 약혼자였던 시스코네의 딸은 누미디아 왕 시팍스의 왕비가 되기로 되었고, 마시니사는 왕으로써의 힘을 잃었다. 누미디아는 2개의 왕국으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하나의 왕국 밖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가 되었다. 이후, 스키피오와 부사령관 라일리우스, 마시니사가 로마군을 이끌게 된다.



기원전 204년, 마고네가 이끄는 제노아에 상륙한 카르타고 지원병력은 한니발을 돕기 위해 하스드루발처럼 남하했으나 로마군에게 패하게 된다.


북아프리카에서는 시스코네가 이끄는 카르타고 군과 마시니사를 몰아내고 하나의 누미디아 왕이 된 시팍스와 로마군은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스키피오는 카르타고에 강화 요청을 핑계로 시팍스에게 중개를 요청한다. 그를 통해, 적진 상황을 관찰한 스키피오는 부하들이 반대한다는 이유로 강화 교섭을 끝낸다. 이후, 야습에 성공하여 대승을 거둔 로마군은 그 다음 전투에서도 기세를 몰아 승리하여 도망치던 시팍스를 붙잡고, 누미디아로 진격을 계속한다. 마시니사는 약혼녀였던 소포니스바 왕비와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하지만, 적국의 왕비였던 소포니스바는 마시니사가 보낸 편지를 읽고 독배를 마신다. 로마로 압송된 시팍스는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에서 감시를 받다가 늙어 죽었다.


이후 카르타고는 로마와의 강화를 요구했고, 로마는 이를 받아들인다. 이탈리아에 남아있던 한니발과 마고네는 이에 따라 카르타고로 귀환하게 되며, 마고네는 귀환 도중 숨을 거둔다. 한니발은 하드루메툼 (現 튀니지의 수스) 에 상륙한다. 강화가 완료되지 않은 휴전 기간 동안 태풍을 만난 로마의 보급선단을 카르타고가 나포하는 일이 발생한다. 스키피오의 반환 요구를 거절함에 따라 다시 전쟁이 재개된다. 기원전 202년, 자마 전투에서 한니발은 스키피오에게 결국 패하게 된다. 그 후, 로마로 개선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는 아프리카를 제압한 자라는 의미에서 '아프리카누스'라는 존칭으로 불리게 된다. 기원전 201년, 이렇게 제2차 포에니 전쟁을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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